아일톤 세나 다시우바(Ayrton Senna da Silva)
1984년 데뷔해 1994년 경기중 사고로 사망할때까지 10시즌동안 월드 시즌 챔피언 3회를 획득하며 성적만으로는 전설로 불리우기 힘들지만 레이싱 드라이버의 열정과 철학 그리고 그의 조국인 브라질의 경제적 위기에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하는 모습으로 레이싱 드라이버로서 뿐만 아니라 경기 외적으로도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F1 데뷔전
1960년 철물점을 하던 밀턴 다시우바와 네이드 세나 다시우바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4살때부터 아버지가 만들어준 카트로 운전을 시작하였습니다.
12세부터 본격적인 카트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남미 카트 그랑프리 우승을 시작으로 매년 카팅 월드 챔피언쉽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981년 영국 포뮬러 포드 1600 레이스를 시작으로 F1 드라이버의 꿈을 시작하게 됩니다. 포뮬러 포드 1600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레이스를 잠시 포기했지만 상위 클래스인 포뮬러 포드 2000 출전팀의 오퍼를 받고 어머니의 성인 세나(Senna)로 레이스에 참가하며 1982년 첫 챔피언을 획득하게 됩니다.
1983년 브리티쉬 포뮬러3 챔피언쉽에 데뷔하며 패스티스트 랩 12회, 우승 12회로 시즌 챔피언을 달성하여 F1 팀들로부터 주목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F1 데뷔
톨맨
F1팀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톨맨에서 정식 테스트를 받아 기존 F1 선수보다 빠른 기록을 보여주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결국 톨맨팀에 입단하게 되면서 1984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F1에 데뷔하게 됩니다. 다만 약체였던 톨맨이였기에 세나는 영국 그랑프리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3위로 포디움에 올랐지만 대부분의 레이스를 리타이어를 하게 됩니다.
로터스
1985년 시즌 세나는 로터스와 장기계약을 맺고 이적하게 됩니다. 당시 로터스는 레이스카의 경쟁력이 있는 팀으로 성능이 보장된 레이스카와 세나의 실력이 만나면서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폴투윈을 차지하면서 F1에서의 첫우승을 기록합니다.
1985 시즌 7번의 폴포지션과 2번의 우승을 기록하며 종합 4위를 기록합니다.
1986년시즌은 1985시즌과 동일하게 7번의 폴포지션과 2번의 우승 그리고 시즌 종합 4위를 기록합니다.
로터스와 마지막 시즌이였던 1987년은 메인스폰서가 카멜로 바뀌고 엔진이 혼다V6터보로 바뀌면서 혼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시즌은 윌리엄스의 막강한 성능에 밀려 시즌 종합3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맥라렌 혼다
1988년 세나는 맥라렌과 계약하며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이자 라이벌이였던 알랭 프로스트와 팀메이트가 됩니다.
혼다의 엔진과 역대 최고의 섀시 엔지니어였던 고든 머레이를 영입하여 개발한 MP4/4 레이스카는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며 1988년 시즌 세나가 16라운드중 13라운드에서 폴포지션을 기록하고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제외하고 시즌의 모든 경기를 맥라랜의 드라이버가 나눠 우승할정도로 경쟁팀을 압도하였습니다.
1988년 시즌에 세나는 첫 시즌 챔피언을 차지하며 1989년 시즌 종합 2위 1990년 시즌 1위, 1991년 시즌 1위, 1992년 시즌4위, 1993년 시즌 2위를 기록하며 맥라렌과의 동행을 끝낸다
윌리엄스 르노
1994년 시즌 세나는 윌리엄스 르노팀과 계약을 하며 전시즌 윌리엄스의 액티브서스펜션에 시즌 우승을 내주었던 세나는 다시금 시즌 우승에 도전하려 했으나 FIA는 윌리엄스의 액티브서스펜션을 금지시키며 윌리엄스의 레이스카는 밸런스가 엉망이 되어 세나는 두경기 연속 리타이어하게 됩니다. 결국 3번째 레이스였던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레인 마스터
아일톤 세나의 드라이빙은 무모하리만큼 과감하며 이러한 특성은 비가오는 상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빨랐으며 이를 증명하듯 1988년 시즌 일본 그랑프리에서 팀 동료인 프로스트와 시즌 우승을 놓고 경쟁하며 스타트미스로 10위까지 떨어진 세나는 경기도중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급격하게 순위를 끌어올리며 우승을 차지하며 시즌우승도 달성하게 됩니다.
알렝 프로스트
당시 세나와 영혼의 라이벌이자 팀 메이트였던 프로스트는 윌리엄스팀에서 경쟁하며 서로 경기중 충돌로 리타이어 할정도로 막장 경쟁을 보여주며 감정싸움까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1990년 프로스트가 페라리로 이적후에도 경쟁 하였으며 윌리엄스로 이적후 팀이 세나를 영입하려했지만 윌리엄스 이적 조건으로 세나 영입 방지를 계약 조건에 넣을 정도로 싫어했지만 결국 윌리엄스팀은 세나 영입을 위하여 프로스트를 은퇴시킵니다. 하지만 세나는 경기중 경쟁을 제외하고 친구로서 존중하고 좋아하는 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설의 죽음
1994년 이탈리아 이몰라 서킷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예선때 브라질출신 루벤스 바리첼로의 사고를 시작으로 심텍 소속의 오스트리아 출신롤 란트 라첸베르거가 충돌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세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마음을 다잡고 폴포지션을 차지합니다.
결승 당일 스타트와 동시에 일어난 사고로 세이프티카가 투입되며 소강상태에서 세이프티카가 너무 낮은 속도로 주행해서 세나는 타이어의 온도가 식는다며 세이프티카의 속도를 높이기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경기가 다시 시작하고 세나는 당시 신인이였던 미하엘 슈마허의 압박을 받으며 6랩째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완만한 코너로 이루어진 이몰라의 탐부렐로에 진입했을때 세나의 차량은 그립을 잃은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그대로 방호벽과 충돌하며 사고가 나게 됩니다.
사고 당시 경기중단이 아닌 황기만 발령됐을 정도로 큰사고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그것이 세나의 마지막 레이스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고의 원인은 현재까지 많은 가설만 남긴 미스티리로 남겨져 있습니다.
죽음이후
브라질은 3일간 국가 추모 기간을 선포할 정도로 세나는 브라질의 국민적 영웅이였습니다. 그의 장례가 TV 생중계되고 300만명의 추모 인파가 상파울루 거리에서 통곡하며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습니다.
세나의 죽음이후 F1은 안전 규정을 강화하였으며 사고 당시 경쟁하던 미하엘 슈마허는 세나의 사고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비난 받았을 정도로 세나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혼다와의 관계
세나의 전성기는 맥라렌이 혼다엔진을 사용하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세나와 프로스트의 차이점은 "프로스트는 혼다 엔진을 사용하는 맥라렌 드라이버이고 세나는 맥라렌 셰시에 탑재된 혼다의 드라이버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나와 혼다의 관계는 특별했으며 혼다가 NSX 개발당시 세나를 테스트 드라이버로 참여시켰으며 혼다가 1992년 F1에서 철수를 발표하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일정도로 돈독하였습니다.
전설이된 이유
세나가 역대 F1 선수중에 가장 위대한 선수로 뽑히는 이유는 그의 뛰어난 실력도 있지만 평소 생활에서 사려깊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경기중 부상당한 동료 드라이버를 위해 차를 멈추고 구조를 할정도로 동료애도 뛰어났습니다.
또한 그의 조국인 브라질을 위해 항상 노력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모터스포츠 선수로서 F1 특유의 정치적인 결정을 불편해하며 순수한 경쟁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현재의 F1 선수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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